마음에 얹힌 부채감이 작업의 추동이 된지 오래다. 그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 해소될 수 없는 질문을 화면 위에 쌓는다. 어쩌다 세상은 이러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는가? 한층 길어진 여름과 쏟아지는 폭우, 멸종을 목전에 둔 생명과 사라지는 터전. 결코 화해되지 않는 자연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답이 없는 문제인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끄집어 낸다. 마음에 담아두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낫기 때문에, 질문이 지속될 것을 믿으며.
자연에 대한 개발과 파괴, 대상화와 소유화, 그로 인해 촉발되는 많은 문제들. 이 모든 것은 자연에 대한 사람의 일방적인 시선으로부터 출발한다. 스스로의 한정적인 시선으로 외부를 바라보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사람과 자연은 그 시선을 통해 양분화되어 있다. 우리는 과연 진정한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있는가? 단지 그렇다고 믿고 싶을 뿐 아닌가? 오감으로 인지하는 그 순간부터 자연은 사람에게 있어 완벽한 타자일지도 모른다.
부채감으로 짓눌린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헛웃음과 비유, 약간의 우화다. 옛 시대의 그림들을 들여다 본다. 이 모든 문제를 해소할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자연과 사람을 하나의 유기체로 여기던 시절의 이미지는 판타지에 가깝다. 안타깝게도 모든 판타지에는 슬픔이 있다. 다가갈 수 없는 비련 같은 것. 그와 동시에 나는 그 오래된 그림들이 사람의 관점에서, 오직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을 인식한다. 지극히 이기적인 시선이다. 나는 옛 그림을 통해 해답을 찾으려는 동시에 사람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의 한계를 체감한다.
그러한 시선의 한계는 현대 사회에서 초래되는 여러 생태적 문제들과 깊은 유착관계를 가진다. 내가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며 목격한 개발논리 또한 그로부터 뻗어나온 한 갈래의 줄기다. 슬퍼진 나는 시간의 경계를 허문다. 이 모든 문제가 하루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래되고 지독한 시선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아주 높은 확률로 지속될 것이라는 암시를 남긴다. 시간의 경계는 과거의 이미지 위에 개입되는 나의 인위적 손길로 인해 흐릿해진다. 이제 이 이미지는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그 무엇이 된다.
날개 달린 사슴을 그린다. 화면 속 그들이 어떤 기분인지는 알 수가 없다. 무언가를 그려내는 것은 권력이다. 그리는 주체는 대상을 재단하고 조율하며 스스로의 내면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리는 자의 적극적인 주체성이 부여되는 이 행위에서 나는 때로 거만해지고, 자연은 그로 인해 감상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나 또한 그렇게 일방적이며 이기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불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염세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한정적인 시선으로 희망을, 더욱 극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연민 혹은 불안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한 가닥의 아름다움으로 슬픔을 엮어내는 것. 그 마음에 한 발짝 다가가려 발을 띄워 본다. 아직도 발은 허공 속에 있다. 땅을 딛는 감각은 무거울까, 아니면 가뿐할까? 나의 창작이 언제쯤 질문이 아니라 답변이 될지 눈을 감고 가늠해 보지만 아직은 요원한 듯하다.
바다를 생각하면 이제 한 점의 찌꺼기 같은 불편함이 나를 자꾸만 괴롭힙니다. 사실 묻어두고 감춰둘 수 있는 것이기도 한데 굳이굳이 품고 살아가는 것은 그냥 개인적인 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지독한 것들로 가득하고, 그럼에도 그 속에서 아름다움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더듬거리는 나날들이 수없이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점점 그러한 실마리에 대한 가냘픈 희망들이 조금 더 가늘어짐을, 실눈을 뜨고 흐릿하게 바라봐야만 겨우 버틸 수 있음을 절감합니다.
때로는 그 모든 위기와 분노에 대해 멋대로 토해내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영원히 이 세상의 가장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 겉돌다가 더디게 멸망하겠지요. 놀이동산의 환호성과 항구의 잡동사니들이, 박물관에 박제된 새들의 눈빛이 허파를 방글거리게 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웃기로 작정한 것처럼요. 한 점의 회를 먹습니다. 이로써 끝에 조금 더 가까워졌을지도 모르지요. 햇빛이 닿지 않는 바닷속의 시커먼 어둠을 생각하면 이 하얀 살점이 의아스럽기도 합니다. 그 살점을 품은 수많은 생들, 맞잡은 손, 절멸을 생각하며 시간을 자꾸만 흘리고 슬프게 비웃습니다.
희망은 이따금씩 무책임하지만 절망은 깊은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들은 뚝뚝 떨어지는 미련과 애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지독한 욕심도요. 어떻게든 꾸역꾸역 이야기하겠다는 그런 욕심으로 마구 꺼내놓고는, 이것 좀 보라며 팔을 휘적거려 봅니다. 휘적대는 팔에 힘이 실려 온몸이 흔들거리기도 합니다. 그 무용하고 어색한 몸짓이 나를 다시금 나아가게 합니다. 아무 가치도 없이 일렁이는 파도 위의 윤슬이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되는 것처럼요. 절망 속에서 어둠을 어슴푸레 바라보는 그 시선이, 복잡한 마음으로 뒤범벅된 삐딱한 헛웃음이 뜬구름 잡는 희망보다 더 희망답지 않을런지요.
바다에서 보말을 줍던 어린 날의 끈적이는 소금기가 떠오릅니다. 어쩌면 날것의 비린내와 텁텁한 짠내로 뒤범벅돼 스스로를 마음껏 망치던 기억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겪어온 무수한 삶의 결들 속에서 바다가 배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소용없어지는 미래가 오더라도 그 하나의 애착만이 나를 붙들어 매고 또 무수한 ‘징조들’을 바라보게 만들겠지요. 그로부터 감지되는 불안이 점점 명확해져 가더라도 나는 절망을 표류하며 이미지 속으로,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갈 것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바다의 밑바닥까지도요.